해라바 (권력 비판, 사적 제재, 성장 서사)

흔한 조폭물인 줄 알았으나 주인공의 서툰 다짐 장면에서 남다른 무게감을 느꼈습니다. 이 영화를 계기로 배우 김래원의 매력에 깊이 빠져들었고, 극 중 캐릭터 같은 남자를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권력 비판: 개발 논리가 삶을 어떻게 삼키는가
한 남자가 조용히 살겠다고 다짐하는 이야기가 왜 이렇게 처절해지는 걸까요? 저는 그 답이 조판수라는 인물에 있다고 봅니다. 그는 단순한 악당이 아닙니다. 시의원에 당선되어 "낡은 것은 버리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여야 발전이 가능하다"라고 연설하는 인물입니다. 이 대사가 섬뜩한 이유는, 그 '낡은 것'이 다름 아닌 해바라기 식당을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작품이 보여주는 권력 구조는 토착 세력의 헤게모니 그러니까 지배 집단이 폭력이 아닌 동의와 문화적 설득으로 피지배 집단을 통제하는 방식과 닮아 있습니다. 여기서 헤게모니란 이탈리아 사상가 그람시가 제시한 개념으로, 지배가 노골적인 강제가 아닌 '상식'과 '정상성'의 언어로 포장될 때 더 강력해진다는 이론입니다. 조판수가 공권력, 자본, 지역 여론을 동시에 장악한 채 식당 하나를 무너뜨리려는 방식이 정확히 이 구조를 따릅니다.
제가 직접 이 장면들을 보면서 느낀 것은, 경찰이 신고를 받고도 "밥 시간이야, 밥시간"이라며 넘기는 장면이 단순한 코미디가 아니라는 점이었습니다. 공권력이 시스템으로서 기능하지 못하고 권력자의 편의에 따라 작동하는 구조, 그게 이 영화가 가장 날카롭게 찌르는 지점입니다. 국가폭력 이란 개념도 여기에 해당합니다. 국가폭력이란 직접적인 물리력뿐 아니라 국가 기관이 보호를 방기함으로써 특정 계층에게 가해지는 구조적 해악까지 포함하는 개념입니다.
한국 사회에서 이런 지역 토호 세력과 개발 이익이 결탁하는 구조는 실제로도 반복되어 왔습니다. 도시 재개발 과정에서 발생하는 강제 철거와 주거권 침해 문제는 지금도 진행 중입니다 출처: 국가인권위원회 https://www.humanrights.go.kr)이 영화가 허구의 이야기처럼 느껴지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 제가 가장 인상 깊었던 구조적 장치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시의원 당선 → 공권력과의 유착 경로 확보
- 쇼핑몰 개발 명분 → 식당 강제 매입 시도의 정당화
- 조직원 동원 → 직접 폭력의 외주화로 법적 책임 희석
- 경찰 방관 → 피해자의 제도적 구제 통로 차단
이 네 단계가 하나의 흐름으로 맞물리면서, 태식 가족은 어떤 합법적 수단으로도 자신을 지킬 수 없는 상황에 몰립니다. 저는 그 구조를 보면서 이건 단순히 나쁜 사람이 나쁜 짓을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성장 서사: 다짐과 파멸 사이, 그럼에도 남는 것
태식이라는 인물을 어떻게 봐야 할까요? 저는 이 질문을 영화 내내 붙들고 있었습니다. 그는 적분을 독학으로 익혔고, 대학 진학을 꿈꿨으며, 첫 월급으로 어머니에게 선물을 샀습니다. 제 경험상 이런 디테일이 쌓이면 관객은 자연스럽게 그 인물을 응원하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응원이 후반부의 비극을 더 가혹하게 만드는 장치가 됩니다.
캐릭터 아크(character arc)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이는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주인공이 겪는 내면의 변화와 성장 궤적을 가리키는 서사 용어입니다. 태식의 캐릭터 아크는 전형적인 구원 서사처럼 시작합니다. 하지만 어머니가 숨진 후 오라클 나이트클럽으로 걸어 들어가며 "꼭 그렇게 다 가져가야만 시원했냐"라고 뱉어내는 순간, 그 아크는 구원이 아닌 파멸로 완성됩니다.
저는 이 결말에 대해 양가적인 감정을 느꼈습니다. 한편으로는 부패한 시스템에 아무런 제도적 대안도 없을 때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좁은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강렬하게 공감했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 영화가 사적 제재(私的 制裁), 즉 국가 기관을 거치지 않고 개인이 직접 범법자를 응징하는 행위를 너무 손쉽게 카타르시스의 도구로 쓰고 있지 않은가 하는 의문도 들었습니다. 여기서 사적 제재란 법치주의 원칙상 허용되지 않는 자력구제 행위를 뜻하며, 법철학적으로는 국가 폭력의 독점성에 도전하는 개념으로 논의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완전히 허무주의로 끝나지 않는 것은, 희주가 대학 강의실에서 라플라스 변환(Laplace transform)을 배우는 장면 덕분입니다. 라플라스 변환이란 공학·수학에서 복잡한 미분방정식을 다루기 쉬운 대수 방정식으로 바꿔주는 변환 기법으로, 여기서는 공부를 통한 생존과 도약의 상징으로 읽힙니다. 제가 직접 이 장면을 봤을 때, 앞서 태식이 감옥에서 수학 선생님과 함께 적분을 배우던 기억이 겹쳐지면서 그 의미가 두 배로 다가왔습니다. 붕괴한 가족 안에서도 배움은 이어졌고, 그것이 살아남은 자의 언어가 된 셈입니다.
한국 영화에서 복수 서사가 갖는 사회적 기능에 대해서는 학계에서도 꾸준히 논의되어 왔습니다. 국가가 보호하지 못할 때 개인이 택하는 자력구제의 서사는 관객의 대리 만족을 넘어, 제도 불신의 감정적 표출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정리하면, 이 작품은 태식 개인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소외계층이 개발 권력과 부패 시스템 앞에서 얼마나 무력해지는지를 보여주는 사회극입니다. 사적 제재로 귀결되는 결말이 아쉬운 것은 사실이지만, 그 아쉬움 자체가 이 영화가 던지는 질문의 무게를 증명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한 번쯤 생각해 보셨으면 합니다. 제도가 작동하지 않을 때 사람들은 무엇을 선택하는지, 그리고 우리는 그 선택을 단순히 잘못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 영화를 다 보고 난 뒤에도 그 질문이 한참 동안 머릿속에 남았습니다. 아직 이 작품을 보지 않으셨다면, 단순한 액션 영화가 아니라 한 편의 사회 비극으로 받아들이고 보시길 권합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wHpfbYn9R4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