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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에서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 흑백의 돌들이 박히는 순간마다 위태롭게 출렁이는 인물들의 생사를 보며 숨을 참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바둑판이 전쟁터가 되고, 한 수 한 수가 목숨과 직결되는 설정은 이 영화를 단순한 조폭 액션과는 전혀 다른 무게감으로 올려놓았습니다.

 

프로가 인정한 착수 동작, 집념의 결과물

제가 직접 극장에서 봤을 때 처음부터 이상하게 눈이 간 것이 있었는데, 바로 정우성 배우의 손이었습니다. 돌을 집어 판에 내려놓는 그 동작이 어색하지 않고 오히려 묘한 긴장감을 품고 있어서였죠. 비하인드를 접하고 나서야 그 이유를 알았습니다. 바둑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출발한 그가, 프로 사범들도 인정할 수준의 손동작을 만들기 위해 한동안 손에서 바둑돌을 놓지 않았다고 합니다.
여기서 착수(着手)란, 바둑에서 자신의 돌을 반상 위의 특정 지점에 내려놓는 행위를 뜻합니다. 단순히 돌을 올려두는 게 아니라 손가락의 힘 배분, 손목의 각도, 내려놓는 속도까지 체화된 동작이어야 비로소 '고수'처럼 보입니다. 이 작은 동작 하나에 몇 달을 쏟아부은 배우의 집념이, 제가 스크린에서 느낀 그 특유의 무게감을 만들어낸 셈이었습니다.

이 영화가 바둑 소재를 얼마나 진지하게 다뤘는지는 연출 구조에서도 드러납니다. 감독은 영화 한 편을 바둑 한 판을 두는 구조로 설계했고, 각 단락을 바둑 용어로 나누어 브리지를 만들었습니다. 브리지란 각 장면의 전환을 자연스럽게 연결하는 서사적 고리를 뜻하는데, 이 영화에서는 바둑의 포석, 중반전, 끝내기 같은 흐름이 그대로 서사에 녹아 있습니다. 캐릭터 캐스팅에만 8개월이 걸렸다는 사실 역시, 이 영화가 얼마나 촘촘하게 설계된 작품인지를 방증합니다.
어릴 적 명절마다 할아버지께서 낡은 나무 바둑판에 혼자 기보를 들여다보시며 돌을 툭툭 놓으시던 모습을 곁에서 구경하던 기억이 있습니다. 기보(棋譜)란 바둑 대국의 수순 전체를 기록한 것으로, 고수들은 이를 되풀이 읽으며 수 읽기 능력을 키웁니다. 그때는 그저 지루한 돌 뒤집기처럼 보였지만, 이 영화를 보고 난 뒤에야 그 조용한 승부의 무게를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됐습니다.


맹기 대국이 준 압도적인 카타르시스

 

이 영화에서 제가 가장 숨을 멈췄던 장면은 안성기 배우가 연기한 주님이 살수와 맹기(盲棋)로 대국을 두는 신이었습니다. 맹기란 바둑판을 눈으로 보지 않고 머릿속으로만 판세를 그려가며 착수하는 방식을 말합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팔까지 잃은 채로 바둑판의 도래 위치를 전부 외워 수를 읽어내는 주님의 모습은 단순한 액션 장면이 아니었습니다.
탐욕에 눈이 먼 악당들 틈에서 눈이 멀고 팔이 잘려도 자신의 존엄을 놓지 않으려는 그 처절한 집착에서, 저는 묘하게 삶의 온기 같은 것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이 영화를 보고 나서 한참 동안 극장 로비에 서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안성기 배우가 이 장면을 위해 눈을 감고 바닥 도(道) 위치를 끊임없이 연습했다는 후일담은, 배우와 캐릭터가 하나로 녹아드는 순간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잘 보여줍니다. 비하인드에 따르면, 그가 스스로 관객이 바둑의 흐름을 인지할 수 있도록 대사를 현장에서 새로 제안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촬영 현장에서 배우가 서사의 완성도를 직접 챙긴 셈입니다.
이 장면의 완성도를 높인 또 하나의 요소는 조명 연출이었습니다. 감독은 기본적으로 옆방 조명을 활용해 배우의 얼굴에 강한 콘트라스트를 만들었는데, 콘트라스트란 빛과 그림자의 명암 차이를 극단적으로 대비시켜 피사체의 입체감과 극적 긴장감을 높이는 촬영 기법입니다. 그 덕분에 어두운 공간 안에서도 인물의 감정이 선명하게 살아났습니다.

이 영화의 비하인드에서 특히 인상 깊었던 점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착수 동작 완성을 위해 수개월간 바둑돌을 손에서 놓지 않은 주연 배우의 준비 과정
- 바둑 한 판의 구조를 그대로 영화 서사에 이식한 연출 설계
- 맹기 대국 장면에서 배우가 현장에서 직접 대사를 제안하며 완성도를 높인 에피소드
- 냉동창고 신을 한겨울 영하의 날씨에서 질소가스로 서리를 연출하며 촬영한 현장 고충
- 장생이라는 한국 바둑 역사상 극히 드문 무승부 결말을 복수 서사의 마침표로 사용한 선택

한국기원 자료에 따르면, 실전 바둑에서 장생이 발생한 사례는 현대 프로 대국 전체를 통틀어도 손에 꼽을 만큼 드뭅니다 [출처: 한국기원] (https://www.baduk.or.kr) 그 희귀한 수를 결말에 배치한 것은, 단순한 복수극이 아닌 '지지 않기 위한 버팀'이라는 주제를 가장 영리하게 표현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장생 결말이 남긴 여운과 아쉬움

 

태석과 살수의 최후 대국이 장생(長生)으로 끝나는 장면은, 제가 이 영화에서 가장 오래 기억에 남는 부분입니다. 장생이란 같은 모양이 영원히 반복되는 형태로, 한국 바둑 규정상 동연반복 금지 원칙에 따라 무승부로 처리됩니다. 2013년 국내 프로 대국에서 딱 한 번 기록됐을 만큼 현실에서는 거의 발생하지 않는 극히 이례적인 국면입니다. 감독이 이 장면을 결말로 택했을 때, 단순히 드라마틱한 효과만을 노린 것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복수를 완성하고도 이기지 않은, 그러나 지지도 않은 태석의 그 표정에서 저는 "이 사람은 살아남기 위해 싸운 것"이라는 감각을 받았습니다. 영화가 내내 질문하던 "우리 인생에도 신의 한 수가 있을까"라는 대사의 무게가 그 장생 한 수 안에 다 담겨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후반부로 가면서 바둑이 가진 고유의 심리전이 점점 뒤로 밀리고, 칼과 주먹이 오가는 육탄전의 물량 공세로 치닫는 부분은 개인적으로 아쉬웠습니다. 바둑으로 시작해서 바둑으로 끝난다는 느낌이 끝까지 유지됐더라면, 주님의 그 묵직한 대사가 조금 더 오래 남았을 것 같기도 합니다. 이 점은 장르 영화의 관습적인 클리셰가 서사의 밀도를 일부 희석시킨 아쉬운 지점으로 남습니다.

한국영상자료원이 보존하고 있는 한국 장르 영화 아카이브에서도 이 작품은 바둑이라는 비주류 소재를 범죄 액션 장르로 변환한 드문 시도로 기록되어 있습니다([출처: 한국영상자료원 (https://www.koreafilm.or.kr) 그 시도만으로도 이 영화는 충분히 기억될 자격이 있습니다.

벼랑 끝에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지지 않기 위해 버티는 한 수. 영화 신의 한 수는 그 이야기를 흑과 백의 돌 위에 새겨 넣었습니다. 바둑을 전혀 몰라도 괜찮습니다. 저처럼 바둑이 그저 어르신들의 취미인 줄만 알았던 사람도, 이 영화 앞에서는 제 지나온 삶을 한 번쯤 되돌아보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