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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2월 12일, 수도 서울 한복판에서 아군끼리 총을 겨누는 총격전이 벌어졌습니다. 영화를 보면서 저는 설마 이 정도였을까 싶었는데, 화면이 진행될수록 그 설마가 사실로 확인되는 충격을 연거푸 받았습니다. 결과를 이미 알고 보는 역사임에도 불구하고, 두 시간 내내 심장이 쉬질 않았습니다.

권력 사유화: 하나회가 군대를 삼킨 방식

군사쿠데타(coup d'état)라고 하면 흔히 탱크가 청와대를 향해 일직선으로 달리는 장면을 떠올리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제가 영화를 직접 보고 느낀 건 전혀 달랐습니다. 12·12는 정면 돌파가 아니라 인맥과 정보 독점, 그리고 심리전으로 완성된 반란이었습니다.

신군부의 핵심 조직인 하나회는 육군사관학교 64기생을 중심으로 경상도 출신 장교들을 대상으로 결성된 사조직이었습니다. 여기서 사조직이란, 공식 지휘 계통 바깥에서 혈연·지연·학연으로 묶인 비공식 권력 집단을 의미합니다. 겉으로는 군인이었지만 속으로는 '형님'이라는 암호명으로 서로를 확인하며, 절대복종의 서약을 강제하는 조직이었습니다.

이들이 쿠데타를 성공시킬 수 있었던 결정적 수단은 통신망 장악이었습니다. 전두광 측은 육군 전체 통신망을 도청하고 있었기 때문에, 개엄사령관과 육군본부가 나누는 대화를 실시간으로 파악했습니다. 이태신 수경사령관이 행주대교 차단 계획을 전화로 지시하는 순간, 반란군 측은 이미 그 내용을 엿듣고 있었습니다. 이런 정보 비대칭(information asymmetry), 즉 한쪽이 상대방보다 훨씬 더 많은 정보를 가진 상태는 전략적 판단에서 결정적 우위를 만들어냈습니다.

또한 신군부는 지연·학연 네트워크를 총동원해 전방 사단장들을 심리적으로 무력화했습니다.실패하면 반역, 성공하면 혁명 이라는 논리로 공범 의식을 심어주고, 한 번 탑승한 열차에서 내릴 수 없다는 군중 심리를 이용했습니다. 저는 이 장면이 제일 섬뜩했습니다. 정의나 국가가 아니라, 집단 이탈 비용에 대한 두려움이 사람을 묶어두는 방식을 너무 생생하게 보여줬기 때문입니다.

이 쿠데타가 성공한 배경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하나회 내부의 절대 복종 서약을 통한 강한 결속력
- 육군 전체 통신망 도청을 통한 정보 독점
- 혈연·지연·학연을 활용한 중간 지휘관 포섭 및 중립화
- 공범 의식을 심어 이탈을 막는 군중 심리 이용
- 수도권 방위 핵심 지휘관 3인을 연이동 술자리에 묶어두는 전술적 기만

실제로 12·12 군사반란을 다룬 국가기록원의 기록에 따르면, 이날 하나회 측은 합동수사본부장직을 이미 내정해 놓은 상태에서 작전을 개시했습니다. 공식 수사 기구마저 사전에 사유화 한 상태에서 반란이 시작된 것입니다 [출처: 국가기록원](https://www.archives.go.kr)

 

제도적 무력성: 이태신은 왜 혼자였는가

이 영화를 두고  이태신 대 전두광의 영웅 대 악당 구도 로 읽는 시각도 있는데, 저는 그 프레임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이태신의 패배는 개인의 용기 부족이 아니라, 그를 지원했어야 할 제도가 처음부터 끝까지 작동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문민통제(civilian control of the military)란 군대가 민간 정치 권력, 즉 대통령과 국방장관의 명령 아래 복종하는 원칙을 의미합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군의 정치적 중립성을 보장하는 가장 기본적인 장치입니다. 그런데 이날 국방장관은 사태가 벌어지는 내내 미국 대사관으로 피신했고, 어느 누구도 그의 소재를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문민통제의 핵심 고리가 첫 번째로 끊어진 순간이었습니다.

작전통제권 즉 전시 또는 유사시에 부대를 지휘할 수 있는 실질적 권한 역시 제대로 행사되지 않았습니다. 전방 사단 병력을 서울로 이동시키는 과정에서 한미연합사령부의 작전통제 범위가 어디까지인지에 대한 혼선이 발생했고, 이 제도적 공백이 반란군에게 결정적인 시간을 벌어주었습니다. 한미연합사 측이 사태를 인지하고도 즉각적인 제지에 나서지 않았다는 점은 지금도 군사정치학적으로 규명이 필요한 부분입니다.

제가 직접 영화를 보면서 가장 분노했던 장면은 포격 직전, 국방장관이 반란군 채널을 통해 "사격 중지"를 명령하는 부분이었습니다. 법적으로 정당한 명령권자가 등장했지만, 그가 사용한 채널 자체가 이미 반란군의 것이었습니다. 제도는 형식적으로 살아있었지만 내용적으로는 완전히 포획된 상태였습니다.

군사 쿠데타의 성공 조건을 분석한 연구에 따르면, 쿠데타가 성공하는 데 있어 제도적 저항 세력의 분열과 핵심 지휘부의 비겁한 이탈이 반란군의 무력 수준보다 훨씬 더 결정적인 변수로 작용합니다. 이태신의 고독한 싸움이 처절하게 보였던 이유는, 그가 용감해서가 아니라 그 용기를 받쳐줄 제도가 이미 무너진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결국 서울의 봄이 제게 남긴 질문은 하나입니다. 공적 가치와 절차적 정당성은 사적 결속과 정보 독점 앞에서 왜 이렇게 쉽게 무너지는가. 이 질문은 1979년의 군대 이야기로 끝나지 않습니다. 인사권과 정보를 장악한 사조직이 공식 제도를 내부에서 잠식하는 구조는, 오늘날 우리가 사는 조직과 사회에서도 여전히 작동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영화가 끝나고 한참이 지나도 이 묵직한 감각이 가시지 않았습니다. 관심 있으신 분들께는 단순한 역사 영화가 아닌, 권력의 작동 방식에 대한 교재로 한 번 더 보시기를 권합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la1MP9EOnx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