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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처음엔 그냥 한국판 좀비 블록버스터겠거니 했습니다. 팝콘이나 씹으며 두 시간 보내면 되겠다 싶었는데, KTX가 서울역을 출발하는 순간부터 극장 의자 손잡이를 놓지 못했습니다. 스크린을 빠져나와 한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그 묵직한 여운, 지금도 선명합니다.
한국형 좀비 블록버스터가 가능하다는 증거
제가 이 영화를 보러 갈 때 솔직히 반신반의했습니다. 한국에서 좀비 영화가 제대로 될 수 있을까, 어색하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뚜껑을 열어보니 그 걱정이 완전히 기우였습니다.
부산행은 좀비(zombie) 장르의 계보를 충실히 따르면서도 한국적 정서를 자연스럽게 녹여낸 작품입니다. 여기서 좀비 장르란, 1954년 리처드 매드슨의 소설 『나는 전설이다』에서 비롯된 '바이러스나 외부 감염으로 인해 인간성을 잃고 떼를 지어 공격하는 존재'를 중심으로 한 서사 형식을 말합니다. 이 틀을 조지 로메로 감독이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 시리즈로 확장하면서 좀비는 단순한 괴물이 아니라 사회적 은유를 담는 장르로 자리 잡았습니다.
부산행이 특히 영리한 점은 이 좀비를 미지의 공포로 남겨두지 않고, 우리가 이미 TV에서 익숙하게 봐온 전염병 뉴스의 문법으로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메르스(MERS) 사태가 그랬던 것처럼, 이 영화 속 감염 확산 장면은 판타지가 아니라 실제 뉴스 화면처럼 다가옵니다. 메르스란 중동 지역에서 유래한 중증 호흡기 질환으로, 2015년 국내에서 186명의 확진자와 38명의 사망자를 낳은 실제 재난이었습니다 [출처: 질병관리청] (https://www.kdca.go.kr) 그때 우리가 느꼈던 공포와 혼란, 그 감각이 스크린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습니다.
제가 직접 영화를 보면서 가장 놀랐던 건 감염자들의 움직임이었습니다. 기괴하게 관절을 꺾으며 밀폐된 객실을 질주하는 그 속도감은 순전히 물리적 공포였는데, 마동석 배우의 묵직한 맨주먹 액션이 그 공포 사이에서 카타르시스를 만들어냈습니다. 그 순간만큼은 극장 안에서 저도 모르게 숨을 참고 있었습니다.
영화가 보여주는 핵심 서사 구조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헤지펀드 매니저 석우가 소외된 딸 수안을 위해 부산행 KTX에 오름
- 열차 안에서 감염이 시작되며 폐쇄 공간 서바이벌이 전개됨
- 인물들의 선택이 생존과 희생을 가르는 분기점이 됨
- 재난의 원인 제공자인 석우가 타인을 위한 희생으로 서사를 마무리함
좀비보다 사람이 무서웠던 이유, 그 생존 본능의 민낯
제 경험상 이 영화에서 가장 소름 돋은 장면은 감염자가 달려드는 순간이 아니었습니다. 살아있는 사람들이 문을 걸어 잠그는 장면이었습니다. 자기 목숨을 지키기 위해 다른 생존자들을 문밖에 세워두는 그 표정이, 어떤 좀비보다 서늘했습니다.
이 영화는 극한 상황에서 인간의 이기심을 날카롭게 해부하는 서사 기법(narrative technique)을 씁니다. 여기서 서사 기법이란 영화가 이야기를 구성하고 의미를 전달하는 방식, 즉 어떤 인물을 어떤 맥락에 배치해 관객에게 메시지를 전하는 가를 뜻합니다. 용석이라는 인물이 대표적입니다. 그는 재난 내내 타인을 배제하고 자신의 생존만을 추구하는 악역으로 그려지는데, 저는 이 지점에서 조금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내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에서 타인을 방패로 삼는 행동은 분명히 비판받아야 하지만, 그것이 순전히 악의에서만 나온다고 보기엔 인간의 생존 본능이라는 변수가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용석을 일방적인 악인으로 소비하기보다 그 안에 조금 더 균열을 줬다면, 영화가 던지는 메시지가 더 깊게 박혔을 것 같습니다.
반면 석우의 변화는 설득력 있게 그려졌습니다. 처음엔 딸의 안전만 생각하던 이기적인 아버지가, 타인의 도움을 받고 나서 스스로도 타인을 돕는 방향으로 돌아섭니다. 이 변화의 과정을 캐릭터 아크(character arc)라고 부릅니다. 캐릭터 아크란 이야기 전반에 걸쳐 인물이 내적으로 성장하거나 변화하는 궤적을 의미하는데, 부산행의 석우는 그 아크가 감염 확산 속도만큼이나 빠르고 명확하게 설계되어 있습니다. 제가 직접 보면서 눈시울이 뜨거워진 건 바로 그 지점이었습니다.
영화 속 정부가 안전에 이상이 없다 라며 거짓 발표를 반복하는 장면도 그냥 지나치기 어려웠습니다. 실제로 재난 상황에서 정부의 위기 커뮤니케이션(crisis communication) 실패는 피해를 키우는 핵심 원인 중 하나로 지적됩니다. 위기 커뮤니케이션이란 재난이나 위기 상황에서 정부나 기관이 국민에게 정확하고 신속하게 정보를 전달해 혼란을 최소화하는 소통 방식을 뜻합니다. 2015년 메르스 사태 당시 초기 정보 공개 지연이 사태를 악화시켰다는 분석이 여러 연구에서 제기된 바 있습니다 [출처: 한국보건사회연구원](https://www.kihasa.re.kr) 그 기억을 가진 관객이라면 영화 속 거짓 발표 장면에서 단순한 픽션 이상의 감각을 느꼈을 겁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마지막 장면, 살아남은 임산부와 아이가 부르는 노래는 이 모든 이야기의 방점이었습니다. 극한의 이기심이 지배하는 공간에서도 결국 다음 세대를 살려내는 것은 연대와 인간미라는 것을 가장 단순하고 아름다운 방식으로 보여줬습니다.
부산행은 단순히 무섭고 박진감 넘치는 영화로 기억하기에는 아깝습니다. 저도 처음엔 그냥 스릴러물로 즐기려 갔지만, 극장을 나오며 든 질문은 훨씬 불편했습니다. "저 기차에 탔다면, 나는 문을 열어줄 수 있었을까." 아직도 그 답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아직 이 영화를 보지 않으셨다면, 그 불편한 질문을 한 번쯤 스스로에게 던져볼 좋은 기회가 될 겁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pXqOMmSnVh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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