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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서사가 껍데기일 때와 아닐 때

전쟁 드라마라고 하면 영웅적 돌격 장면과 뭉클한 전우애로 채운 감상적 서사라고 보는 시각도 있는데, 저는 이 작품이 그 공식을 정면으로 거부하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전후〉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병참 기지 폭파 작전을 앞두고 분대원들이 나누는 한마디였습니다. "살려고 온 거 아닙니까. 성공해서 살아 돌아가려고 온 거 아닙니까." 이 대사 하나가 극 전체의 무게를 요약합니다.

드라마는 낙동강 전선부터 흥남 철수, 개마고원 설한풍 속 게릴라 탈출까지 실제 한국전쟁의 주요 작전선을 따라 서사를 전개합니다. 여기서 게릴라 전술(Guerrilla Tactics)이란 소규모 병력이 정규군 대형 없이 기습과 매복, 후퇴를 반복하는 비정규전 방식을 의미합니다. 극 중 현중 분대가 산악 지형을 이용해 중공군의 추격을 따돌리는 장면은 이 전술의 현실적 한계와 병사 개개인의 정신력이 어떻게 충돌하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저는 개마고원에서 부대원들이 영하 40도의 동파 직전 상황에서 죽은 전우를 트럭에 실으며 "관에 넣어주지도 못했다"고 중얼거리는 장면에서 실제로 손이 멈췄습니다. 극적 장치가 아니라, 그것이 당시 전선의 실상이었다는 사실이 더 무겁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한국전쟁 당시 흥남 철수 작전(1950년 12월)에서 UN군과 피난민을 포함해 약 10만 5천 명이 해상으로 탈출했으며, 이 과정에서 병력 손실과 민간인 피해가 복합적으로 발생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출처: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https://www.imhc.mil.kr 드라마가 이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깔고 분대원 하나하나의 생존기를 촘촘히 쌓아 올린 방식은, 거시적 역사가 얼마나 많은 개별 죽음으로 이루어졌는지를 다시금 실감하게 합니다.

〈전후〉가 감상적 전쟁 서사와 결정적으로 다른 지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승리의 서사보다 생존의 윤리를 중심에 둔다
- 적군 인물(용택, 수경)에게도 인간적 서사를 부여해 단순한 악역 구도를 해체한다
- 군 조직의 관료주의적 폭력(부대원 사상 심사, 즉결 처분 위협)을 서사의 핵심 갈등으로 설정한다
- 탈영, 비겁, 공포를 패악이 아닌 인간의 자연스러운 반응으로 정면에서 다룬다

인간성이 가장 먼저 소모되는 곳


전쟁을 배경으로 한 극에서 인간성 상실을 다룰 때, 흔히 적의 잔학함을 강조하는 방식을 택한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이 드라마가 훨씬 불편한 방향을 선택했다고 느꼈습니다. 아군 내부에서의 폭력이 때로는 전선보다 더 잔인하게 그려지기 때문입니다.

포로 수용소 에피소드가 대표적입니다. 극 중 박일건 중사가 자치대장 완장을 차고 동료를 구타해야 하는 상황에 몰리는 장면은, 극단적 제도 압박 아래 놓인 개인이 어떻게 자신의 도덕적 기준을 침식당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여기서 자치대(自治隊)란 포로 수용소 내에서 수용자 중 일부를 선발해 경비 보조 역할을 맡기는 제도로, 실제 한국전쟁기 포로수용소에서도 운용된 바 있습니다. 이 제도는 수용자 스스로를 통제 수단으로 활용함으로써 저항 의지를 분쇄하는 심리전적 기능을 했습니다.

제가 특히 오래 생각하게 된 장면은 원철이 동생과 전우들의 죽음에 분노해 결국 포로를 칼로 찌르는 순간입니다. "너희들도 사람이면 이래야지"라는 울부짖음은 이성의 붕괴가 아니라, 증오가 일정 임계점을 넘었을 때의 필연적 귀결처럼 느껴졌습니다. 이런 장면을 보고 나면 전쟁을 이념이나 국가의 이름으로만 설명하는 것이 얼마나 공허한 일인지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심리전이란 상대방의 전투 의지를 정신적으로 꺾기 위해 수행하는 작전을 뜻합니다. 극 중 중공군이 나팔과 징을 울리며 야간에 접근하는 장면은 실제 중국인민지원군이 한국전쟁에서 구사한 심리전 전술을 재현한 것으로, 이는 당시 UN군 병사들 사이에서 상당한 공포를 유발했다고 군사 기록에도 남아 있습니다.

또한 극 중 이수경 캐릭터는 저에게 가장 오래 남는 인물입니다. 이념적 확신을 가지고 북으로 넘어갔지만, 결국 "지쳤어, 쉬고 싶어"라는 말 한마디로 모든 것이 수렴되는 순간은 이념의 허위성이 아니라, 인간의 소진(Burnout)이 어떤 방식으로 신념을 잠식하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라 느꼈습니다.

 

군사 권위주의가 남긴 구조적 상처

드라마가 단순한 전쟁 감동 서사에 머물지 않는 이유는 군사 권위주의(Military Authoritarianism)에 대한 비판적 시선을 놓지 않기 때문입니다. 군사 권위주의란 군 조직의 위계와 명령 체계가 민주적 절차나 개인의 기본권보다 우선시되는 상황을 의미합니다.

병참 기지 폭파 작전을 성공적으로 완수하고 복귀한 분대원들이, 오히려 군 당국의 사상 심문 대상이 되어 즉결 처분 위협을 받는 장면은 제가 가장 분노했던 대목입니다. 명령에 따라 목숨을 걸고 임무를 완수한 병사를 이적 행위 혐의로 몰아가는 관료주의적 메커니즘은 전쟁이 끝난 뒤에도 국가폭력의 형태로 개인을 압박한다는 사실을 상기시킵니다.

라는 의견도 있지만, 저는 이 부분이 단지 극적 긴장을 높이기 위한 장치가 아니라 실제 한국전쟁 전후 역사에 근거한 비판적 서술이라고 봅니다. 한국전쟁 기간 중 군 내 연좌제와 사상 심사를 통한 부당한 처분 사례는 이후 진실화해위원회 조사를 통해 일부 공식 확인된 바 있습니다 출처: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https://www.jinsil.go.kr

천성일 병장의 결말도 같은 맥락에서 읽힙니다. "죽고 싶지 않습니다. 죽이고 싶지도 않습니다"라는 말은 탈영의 변명이 아니라, 국가라는 거대한 폭력 앞에서 개인이 발화할 수 있는 가장 솔직한 언어입니다. 그 선택이 결국 사살로 끝난다는 서사는 이 드라마가 체제 순응을 미화하지 않겠다는 선언처럼 느껴졌습니다.

〈전후〉를 보고 나서 저는 한동안 자리를 뜨지 못했습니다. 마지막 훈장 수여식에서 전사자와 실종자의 이름이 하나씩 호명될 때 쏟아진 눈물은 드라마에 대한 감동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국가가 개인의 죽음을 어떻게 사후에 명명하고 의미화하는가에 대한 묵직한 불편함이기도 했습니다. 이 작품에 대해 "감동적인 전우애 드라마"로만 기억하기에는 던지는 질문이 너무 많습니다. 직접 보시고, 어느 장면에서 멈추게 되는지 확인해 보시길 권합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6nwcvPKHQ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