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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한 편에서 등장인물 중 양심을 끝까지 지키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처음 그 사실을 알아챘을 때 저는 꽤 오래 화면을 멍하니 바라봤습니다. 세운빌딩을 둘러싼 재개발 이권 다툼이 촉매가 되어 가족, 친구, 동업자 사이의 신뢰가 차례로 무너지는 이 이야기는 범죄 스릴러의 외형을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인간이 돈 앞에서 얼마나 빠르게 변할 수 있는지를 냉정하게 해부하는 영화입니다
인간욕망: 가족을 위해서라는 말의 유통기한
기수종이 처음 건물주가 되려 했을 때 동기는 단순했습니다. 청각장애를 가진 딸 다래의 미국 유학비를 마련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목적 자체는 아무도 비난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극이 진행될수록 저는 계속 불편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게 됐습니다. "가족을 위해서"라는 명분은 언제부터 욕망을 포장하는 언어로 바뀌는 걸까요.
수종은 알바를 전전하며 빚을 갚는 동안에도 아내에게 거짓말을 했고, 딸 앞에서는 여전히 건물주 아빠인 척했습니다. 이 장면들이 저한테는 범죄 장면보다 훨씬 더 무겁게 느껴졌습니다. 실제로 저도 몇 년 전 지인과 돈 문제로 갈등을 겪은 적이 있었는데, 그때 서로 제일 많이 썼던 말이 "나 이러려던 게 아니었는데"였습니다. 수종도 계속 그 말을 하는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런 현상을 자기 합리화라고 부릅니다. 자기 합리화란 자신의 행동이나 선택이 도덕적으로 옳다고 스스로를 설득하는 인지적 왜곡을 뜻합니다. 수종이 점점 더 큰 거짓말을 반복하면서도 "다래를 위해서"라는 프레임을 놓지 않는 모습은 이 기제의 교과서적인 사례였습니다. 욕망이 커질수록 합리화의 언어도 함께 정교해졌고, 그게 가장 무서웠습니다.
드라마는 수종 혼자만이 아니라 거의 모든 인물에게서 이 패턴을 반복해서 보여줬습니다. 활성은 아내를 납치하면서도 장모에게서 벗어나기 위해서라고 말했고, 리얼캐피털 직원 요나는 비즈니스일 뿐이라는 말로 협박과 살인 교사를 정당화했습니다. 각자의 언어는 달랐지만 구조는 동일했습니다. 누군가를 위한다는 말이 사실은 자신을 위한 선택을 감추는 방어막이었던 것입니다.
재개발: 이권이 인간관계를 어떻게 해체하는가
세운빌딩이 재개발 구역에 포함될 수 있다는 정보 하나가 이 드라마의 모든 갈등을 촉발시켰습니다. 재개발(再開發)이란 노후화된 도시 지역을 철거하고 새롭게 개발하는 사업을 의미하는데, 현실에서도 이 단어는 단순한 건축 행위가 아니라 막대한 이익을 둘러싼 권력 다툼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실제로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서울을 포함한 주요 도시의 정비사업 구역은 수백 곳에 달하며, 구역 지정과 해제 과정에서 내부 정보를 이용한 투기 의혹이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습니다 https://www.molit.go.kr 출처: 국토교통부드라마 속 리얼캐피탈이 채권을 사들이고 건물주들을 압박하며 재개발 부지를 확보해 나가는 과정은 이 현실의 구조적 문제를 정교하게 압축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친구 사이였던 수종과 활성이 서로를 이용하고 결국 배신하는 과정은 제가 이 작품에서 가장 씁쓸하게 본 축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처음에 함께 건물주가 되자며 술을 마셨고, 그 장면에서 진짜 우정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재개발 정보가 개입되는 순간부터 두 사람의 대화에서 진심이 사라지고 계산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이 변화가 꽤 현실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친한 사이일수록 돈 문제에서 무너지는 속도가 더 빠를 수 있다는 걸, 제 경험상 부정하기 어려웠습니다. 드라마가 보여준 재개발 이권 구조의 핵심 경로를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리얼캐피털이 재개발 예정 구역 내 건물주들의 채권을 저가에 매입합니다.
채권 양수도(債權讓受渡), 즉 채권자가 바뀌는 계약을 통해 건물주들은 협상 상대를 갑자기 모르는 회사로 바뀌게 됩니다.
새 채권자는 단기 상환 압박과 불법 영상 등 약점을 활용해 건물 매각을 강요합니다.
내부 정보를 가진 공무원이나 관계자가 구역 변경 정보를 사전에 넘겨 특정 부지 확보를 돕습니다.
결국 건물주들은 개발 이익을 박탈당하고 거대 자본에 흡수됩니다.
이 구조는 허구처럼 보이지 않았습니다. 한국토지주택공사(LH) 직원들의 투기 사건에서도 확인됐듯이, 정보 비대칭(information asymmetry)이 발생할 때 일반 시민이 구조적으로 불리해지는 패턴은 현실에서도 반복되어 왔습니다 https://www.lh.or.kr 출처: 한국토지주택공사 드라마가 이 구조를 인물들의 심리와 엮어 풀어낸 방식은 꽤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신뢰붕괴: 거짓말 하나가 어떻게 모든 관계를 먹는가
이 드라마를 보고 나서 제가 가장 오래 생각한 것은 사건이 아니라 수순이었습니다. 수종의 첫 번째 거짓말은 아내에게 건물 상태를 숨긴 것이었습니다. 그 거짓말을 유지하기 위해 다음 거짓말이 필요했고, 그다음 거짓말을 위해 또 다른 거짓말이 층층이 쌓였습니다. 결국 마지막 장면에서 수종 곁에는 아무도 남지 않았습니다.
인지부조화(cognitive dissonance)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인지부조화란 자신의 신념과 행동이 충돌할 때 느끼는 심리적 불편감을 뜻하는데, 이 불편감을 줄이기 위해 사람들은 거짓말을 하거나 사실을 왜곡하는 방향을 선택하기도 합니다. 수종이 딸에게 "아빠가 다 예약할게"라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아내의 유학 자금을 건드리고 있던 장면이 저한테는 이 개념의 가장 뼈아픈 묘사처럼 느껴졌습니다. 그 장면에서 저는 답답하면서도 이상하게 이해가 됐는데, 궁지에 몰린 사람이 현실을 직면하는 대신 언어로 현실을 유예하는 심리가 그렇게 낯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활성의 경우는 더 직접적이었습니다. 그는 아내를 납치하면서도 "너하고만 잘 살고 싶었어"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이 거짓말인지 아닌지는 사실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그게 진심이었다 해도 결과적으로 폭력적인 선택을 정당화하는 언어로 기능했기 때문입니다. 좋은 의도가 자동으로 좋은 행동을 만들지 않는다는 것, 그게 이 드라마가 가장 무겁게 던진 질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웠던 점도 있었습니다. 등장인물들이 거의 예외 없이 극단적으로 망가지는 모습만 보여준다는 점이었습니다. 저는 현실에서 돈 문제가 생겼을 때도 끝까지 선을 지키려는 사람들을 본 적이 있었고, 그런 인물이 드라마 안에도 하나쯤은 있었다면 이야기가 더 입체적이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 부재 자체가 어쩌면 의도된 과잉이었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도 열어두고 싶습니다.
결국 이 작품이 내내 하는 말은 하나로 수렴되는 것 같았습니다. 사람은 무너질 때 갑자기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작은 거짓말 하나에서 시작해서 그것을 지키기 위한 더 큰 선택들이 쌓이면서 어느 순간 되돌아올 수 없는 지점을 넘어버린다는 것이었습니다. 드라마를 보는 내내 나라면 어디서 멈출 수 있었을까 라는 질문이 계속 따라다녔습니다. 한 번쯤 그 질문을 직접 자신에게 던져보고 싶으신 분이라면, 이 작품은 꽤 불편하고 꽤 솔직한 거울이 되어줄 것입니다. 이 글은 개인적인 경험과 의견을 바탕으로 한 감상이며, 전문적인 법률·금융 조언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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