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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영화 국보를 보기 전에는 일본 전통예술을 소재로 한 잘 만든 드라마 정도를 기대했는데, 보고 나서 며칠이 지나도록 뭔가 이상하게 걸리는 감각이 계속 남았습니다. 아름답다는 말이 맞는 것 같으면서도, 마음 깊숙이 닿지 않는 이 거리감이 어디서 오는 건지 꽤 오래 생각했습니다.

 

가부키 미학, 인형화 된 인간의 아름다움

 

모노노아와어릴 때 엄마를 따라 전통 공연장에 갔던 기억이 있습니다. 무대 위 사람들이 왜 저렇게 느리게 걷고, 왜 저렇게 과장되게 팔을 드는지 그때는 그냥 답답하게만 느꼈습니다. 그런데 지금 돌아보면 그 답답함이 사실 가부키 미학의 핵심을 정면으로 충돌하면서 나온 반응이었다는 걸 영화 국보를 보고 나서야 제대로 이해하게 됐습니다.

일본의 문화예술 평론가 가라타니 고진은 가부키를 "인형극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으로, 인형 대신 인간을 쓴 것"이라고 정의한 바 있습니다. 여기서 인형화란 배우 개인의 자연스러운 감정이나 개성을 지우고, 수백 년에 걸쳐 정형화된 동작 체계를 몸에 새기는 과정을 말합니다. 짙은 구마도리 분장, 즉 가부키 특유의 얼굴 화장은 배우 개인의 얼굴을 가면처럼 덮어버리는 기능을 합니다. 구마도리란 근육과 혈관의 흐름을 과장되게 표현하여 감정의 유형을 기호화한 분장법으로, 배우의 개별 표정 대신 역할 자체를 얼굴 위에 그려 넣는 방식입니다.

제가 직접 영화를 보면서 확인한 것도 바로 이 지점이었습니다. 주인공 키쿠오가 어린 시절부터 받는 훈련 장면을 보면, 특정 동작을 수천 번 반복하는 과정이 단순한 연습이 아니라 몸에서 개인성을 지우는 의식처럼 보입니다. 군대의 제식 훈련이 자연스러운 걸음걸이를 구분 동작으로 개념화해서 다수를 하나의 질서 안에 가두는 것과 비슷한 원리입니다.

그렇다면 가문의 혈통이 왜 그토록 중요한가,라는 의문이 자연스럽게 따라옵니다. 가부키에서 동작이 전부라면 재능 있는 개인을 선발하면 될 텐데, 왜 굳이 핏줄을 따지느냐는 거죠. 이 부분에서 저도 처음엔 앞뒤가 안 맞는다고 느꼈습니다. 그런데 가부키 가문의 이름은 일종의 품질보증 기호(Quality Signal)로 기능합니다. 품질보증 기호란 소비자가 직접 확인하기 어려운 품질을 특정 브랜드나 이름이 대신 보장해 주는 신호를 말하는데, 가부키 세계에서는 가문의 명성 자체가 관객에게 "이 배우는 어릴 때부터 혹독하게 훈련받았다"는 신뢰를 선행 제공합니다. 가문도 그 명예를 지키기 위해 후계자를 더 가혹하게 단련시킬 수밖에 없는 구조가 완성됩니다.

영화 속 가부키 공연들이 공통적으로 담고 있는 서사 구조도 이 미학과 연결됩니다.

- 세키노토: 유녀가 복수를 성공한 뒤 스스로 사라짐
- 두 명의 등나무 아가씨: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그림 속으로 돌아가 사라짐
- 도저지의 두 사람: 집착이 원한이 되어 파국으로 치달음
- 손에 잡히는 동반자: 결백을 증명하기 위한 자결

모두 죽음 혹은 소멸로 귀결됩니다. 죽음이 비극의 결말이 아니라 감정의 강도를 극한까지 끌어올리는 표현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 핵심입니다.

 

모노노아와레, 그리고 한국 관객이 느끼는 차가움

 

일반적으로 일본 문화에 관심 있는 분들은 모노노아와레를 "사물의 슬픔을 느끼는 정서" 정도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영화 국보를 보고 나서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모노노아와레(物の哀れ)란 사라져 가는 것, 덧없는 것에서 아름다움과 애달픔을 동시에 느끼는 일본 특유의 미적 감수성을 말합니다. 단순한 슬픔이 아니라 소멸 자체에서 아름다움을 추출하는 감각입니다.

영화의 오프닝과 엔딩이 일본식 정원을 배경으로 수미상관 구조를 이루는 것도 이 맥락에서 읽힙니다. 수미상관이란 작품의 처음과 끝이 동일한 이미지나 구조로 호응하는 기법입니다. 오프닝에서 키쿠오는 집 안에서 창문을 통해 눈 내리는 정원에서 아버지가 죽는 장면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 장면이 평생의 예술적 지향점이 됩니다. 엔딩에서는 키쿠오의 딸이 카메라 렌즈라는 프레임으로 아버지를 바라봅니다. 둘 다 유리창이나 렌즈를 통해 대상을 관상(鑑賞)의 객체로 바라보는 구조입니다.

일본식 정원인 가레산스이(枯山水)가 이 구조를 이해하는 열쇠입니다. 가레산스이란 물 없이 돌과 모래만으로 강이나 바다의 흐름을 추상적으로 표현한 일본의 정원 양식으로, 직접 걸어 들어가는 공간이 아니라 실내에서 창문 너머로 바라보는 관상 대상입니다. 한국의 정자 문화가 자연 속에 직접 들어가 자연과 하나가 되는 방식을 추구한 것과 정반대입니다. 일본은 자연을 박제해서 집 안으로 가져오고, 그것을 프레임 안에 담아 감상합니다.

키쿠오의 딸이 아버지를 카메라로 바라보는 장면에서 저는 이상하게 서늘했습니다. 그 시선에는 원망도 있지만, 동시에 아버지를 살아 있는 인간이 아닌 가부키 가문의 살아 있는 문화 기호로 바라보는 태도가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영화는 그것을 슬프고 이상한 것으로 처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의 완성된 아름다움처럼 다룹니다.

여기서 한국 관객이 느끼는 차가움이 생깁니다. 문학 평론가 박경리는 저서 일본 산고에서 "총괄적인 인간의 삶이 대상이기보다 심층에 깔려 있는 한 부분 의식을 끌어내어 그것을 대상으로 삼는다"라고 지적했습니다. 삶 전체가 아닌 특정한 감각 하나를 극한까지 끌어올리는 방식. 그것이 통속으로 흐르면 괴담이 되고 외설이 되지만, 예술적으로 정제되면 가부키가 된다는 설명입니다.

제가 영화를 보고 나서 가장 오래 남은 질문은 이겁니다. 키쿠오는 예술적으로 성공했는데 왜 기쁘지 않아 보이는가. 우리가 익숙한 예술 성장 서사, 예를 들어 빌리 엘리어트 같은 영화에서는 주인공의 성취가 삶의 긍정으로 이어집니다. 하지만 키쿠오는 성취의 순간에도 부서진 자기 자신을 애처롭게 바라봅니다. 무너진 삶을 한스럽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그 무너짐 자체를 미학적으로 소비합니다. 이것이 서편제의 한(恨)의 정서와 결정적으로 다른 지점입니다. 한은 억울하고 슬프다는 감정이지, 그 슬픔을 아름답다고 여기지는 않습니다.

일본 문화청(文化庁)이 전통예능 보존을 위해 인간국보 제도를 운영하며 가부키 예능보유자를 지정·지원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 영화가 단순한 픽션이 아님을 보여줍니다([출처: 일본 문화청](https://www.bunka.go.jp)). 또한 일본 영화제작자연맹의 통계에 따르면 실사 영화가 천만 관객을 돌파한 사례는 2003년 이후 국보가 처음으로, 22년 만에 나온 기록입니다([출처: 일본 영화제작자연맹](https://www.eiren.org)).

국보는 잘 만든 영화가 맞습니다. 형식적 완성도, 가부키 공연이 이후 서사를 암시하는 구조적 치밀함, 장면 하나하나의 시각적 아름다움. 어느 것 하나 허술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저는 보고 나서 화려한 무대보다 분장을 지운 뒤의 얼굴이 더 오래 남았습니다. 성공한 사람의 환함이 아니라 너무 오래 버틴 사람의 피로가 먼저 보였기 때문입니다. 일본의 정서를 깊이 이해하는 분이라면 그 피로에서 아름다움을 끌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그 바깥에 서 있어서, 그 아름다움 앞에서 잠시 멈칫했습니다. 그 멈칫거림이 이 영화를 오래 기억하게 만드는 이유이기도 합니다.